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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래선 교수 편모 장한 어머니상 수상

  • 등록일 : 2003-06-11
  • 조회수 : 1473
  • 작성자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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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전쟁이 만든 한 풀을 수 있어 - 김래선 교수(수학교육과)의 홀어머니 윤덕례 여사(70세)가 6월 11일 보훈청 강당에서 대한민국전몰군경미망인회가 제정한 2003년도 ''''''''장한 어머니상''''''''을 수상해 화제. 윤여사는 18세에 시집을 가 신혼 6일만에 남편 故김영태 씨가 한국전쟁에 나가 전사하는 바람에 청상과부가 되어 졸지에 가장이 되었다. 그는 시조모, 시부모 등 시댁식구를 모시고 유복자 아들을 키우며 고통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오직 아들 하나만 믿고 하루 하루를 열심히 살았다. 남편의 전사 위로금으로 받은 돈으로 농토 500평을 구입해 근근히 생계를 유지하며, 쉬지 않고 일을 하면서 열심히 생활했다. 주위 사람들은 젊은 아낙네가 열심히 살아가는 것을 보고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시조모를 정성껏 모신다는 세평이 관가에 전해져 1966년 민주공화당 곡성지구당으로부터 ''''''''효행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그는 어려운 형편에도 아들 김래선군을 전주로 유학 보내 고교, 대학, 대학원까지 마치게 하여 오늘의 대학교수(전, 전주대 기획조정처장)까지 만들었다. 그는 근검 절약, 효행정신, 예의범절 만이 가문을 세울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아들이 어릴 적부터 늘 그러한 말을 전해 주면서, 몸소 실천에 옮겼다. 그는 1952년 1월 결혼하고 6일 이후 친정에 다니려 간 사이에 남편이 군대에 가는 바람에 영영 남편을 보지 못하게 되었다. 백마부대원이었던 남편은 1953년 6월 강원도 철원시 금화지구 피의능선에서 전사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그 당시 윤여사는 논밭에 나가 일을 해야 하는 형편이었기에 남편의 시신을 찾아 나설 형편이 되지 못했다. 결국 남편은 국립묘지에 단독으로 묻히지 못하고 충혼탑 합동 분향소에 이름만 남게 되었다. 지금도 그가 한스럽고 통한이 이는 대목은 이 일이다. 그리하여 그는 노무현 대통령에게 청원서를 냈다. ''''''''내가 죽거든 국립묘지에 있는 남편 곁에 묻히게 해 달라''''''''는 것이다. 그의 애절한 사모곡이 정부 기관에 까지 전달될 것으로 보이지만, 그의 한 많은 세월이 이것으로라도 보상되었으면 한다. 그는 신혼의 시기가 없었기 때문에 처음에 혼인신고를 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아들을 낳고 난 이후 망자와 혼인신고를 서둘렀다. 오곡면사무소가 죽은 자와는 혼인신고를 할 수 없다는 유권해석을 하는 바람에 광주고등법원에까지 소를 제기해 망자와 혼인신고를 한 적도 있었다. 그의 고집스런 충효 열녀 정신은 지금 고전 속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일들이다. 고난과 역경을 이기며 살아온 그의 70년 세월. 이중에서도 꼭 아들 김래선 교수의 나이와 같은 기간은 더 소중한 세월일 것이다. 6월 호국보훈의 날을 맞이하여 또 하나의 살아있는 교훈을 얻는 기회로 여겼으면 한다. < 취재 : 홍보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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