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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K+연구단]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의 문인 집단 형성과 전개 Ⲻ 『채미연원록(茝薇淵源錄)』을 중심으로 Ⲻ
작성일 2021-01-08 조회수 724 작성자 한국고전학연구소
첨부 : 20200211.논문.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의 문인 집단 형성과 전개 Ⲻ 『채미연원록(茝薇淵源錄)』을 중심으로 Ⲻ.pdf 파일의 QR Code 20200211.논문.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의 문인 집단 형성과 전개 Ⲻ 『채미연원록(茝薇淵源錄)』을 중심으로 Ⲻ.pdf  20200211.논문.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의 문인 집단 형성과 전개 Ⲻ 『채미연원록(茝薇淵源錄)』을 중심으로 Ⲻ.pdf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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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초록


19세기 후반 위정척사운동과 의병 운동을 주도한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 1833~1906)은 화서학파 문인 가운데 가장 거대한 문인 집단을 형성한 인물 중 한 사람이다. 그는 40세를 전후한 시기부터 강학 활동을 전개하여 생전에 6백여 명을 상회하는 문인 집단을 형성할 정도로 활발하게 강학 활동을 전개하였다. 자신의 근거지인 경기 포천과 말년에 이거한 정산(현 충남 청양)을 중심으로 펼쳐진 강학 활동을 통해 배출된 직전 제자들은 그와 함께 의병 활동의 전면에서 활약하였을 뿐만 아니라 최익현 사후에도 지속적으로 항일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문인 양성에 몰두하여 1천5백여 명을 상회하는 재전 제자를 배출하였다. 그리고 이들을 통해 최익현의 학맥은 사전 제자에까지 2천5백여 명을 상회하는 문인 집단으로 그 외연이 확대되었다. 그동안 학계에서는 최익현의 강학 활동과 그의 문인 집단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같은 시기에 활동한 다른 학파에 대한 연구가 제한적이나마 진행된 것과 달리 최익현의 문인 집단에 대한 연구는 전무하다시피 한 것이 학계의 현실이었다. 본고에서는 이러한 선행 연구의 제한점에 유의하고, 아울러 20세기에 접어들어 활동한 각 학파의 문인들에 대한 관심이 상대적으로 부진한 학계 상황을 고려하여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중후반까지 이어진 최익현의 문인 집단에 대해 지역별 연령별 분석을 통해 그 대체적인 모습을 정리하였다. 문인 집단 분석에 앞서 문인 집단 형성의 근본이 된 최익현의 강학 활동을 그의 행적을 중심으로 고찰하였다. 본 연구의 기본 자료는 1967년 최익현의 직전 제자 및 재전 제자가 중심이 되어 간행한 『채미연원록(茝薇淵源錄)』이며, 이 문인록에 앞서 간행된 『면암선생문인록(勉菴先生門人錄)』 등 기타 자료도 참조하였다. 『채미연원록』의 문인들에 대한 분석 결과, 최익현의 학맥은 호남 지역을 중심으로 계승되었으며, 최익현의 문인들은 일제강점기와 근현대사 전개 속에서 유학의 도를 수호하고자 하는 의식적인 노력 이외에 강한 항일 정신을 바탕으로 실천적인 면모를 보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특히 최익현의 문인들은 지속적으로 내부의 결속을 강화하는 한편, 다른 화서학파 학맥과 구분되는 인식과 면모를 보여 ‘면암학파(勉菴學派)’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구별되는 특징을 보여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