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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항녕의 조선, 문명으로 읽다] 금강산 유람이 조선의 로망, 겸재 그림은 선물보따리
작성일: 2022-02-07 조회수: 378 작성자: 김민정

사대부들의 여행

겸재 정선이 무르익은 필치로 금강산의 진면목을 드러낸 ‘해악전신첩(海嶽傳神帖)’. 금강산 그림 중에서 독보적인 가치를 인정 받고 있다. 내금강의 전경을 다룬 ‘금강 내산’. [사진 간송미술문화재단]

겸재 정선이 무르익은 필치로 금강산의 진면목을 드러낸 ‘해악전신첩(海嶽傳神帖)’. 금강산 그림 중에서 독보적인 가치를 인정 받고 있다. 내금강의 전경을 다룬 ‘금강 내산’. [사진 간송미술문화재단]

노자(老子)는 “죽을 데를 중하게 여겨 멀리 옮겨 다니지 않게 하며, 배와 수레가 있어도 탈 일이 없다. 이웃 나라끼리 바라다보이고, 닭 울고 개 짖는 소리가 들려도 사람들은 늙어 죽을 때까지 서로 왔다 갔다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 말의 역사적 배경을 논하는 건 뒤로 미루겠다. 원래 이렇게 크게 이동하지 않고 삶을 영위하는 건 인류에게 오랜 경험이었다. 농사짓고 사는 사람들에게 땅을 떠나 멀리 나갈 이유가 어디 있단 말인가.

여비·거리 문제로 여행 기회 적어
글과 그림으로 다른 이들과 공유


사대부들의 1순위는 역시 금강산
서울에서 400리, 한 달 여정 코스

금강산 진경 알알이 그려낸 겸재
코로나 시대 ‘갑갑한 방콕’ 달래줘

귀양·관직·사신 등 타지 체험 제한

겸재 정선이 무르익은 필치로 금강산의 진면목을 드러낸 ‘해악전신첩(海嶽傳神帖)’. 금강산 그림 중에서 독보적인 가치를 인정 받고 있다. ‘화적연’. [사진 간송미술문화재단]

겸재 정선이 무르익은 필치로 금강산의 진면목을 드러낸 ‘해악전신첩(海嶽傳神帖)’. 금강산 그림 중에서 독보적인 가치를 인정 받고 있다. ‘화적연’. [사진 간송미술문화재단]

조선시대에 집을 떠나는 경우는 대체로 네 가지 정도를 떠올릴 수 있다. 첫째, 죄인이 돼 귀양 가는 일이다. 귀양은 이제 사라진 형벌 중 하나인데, 집에서 멀리 떨어진 상태로 주거를 제한당하는 것이다. 형기(刑期)가 정해지지 않았기에 언제 집으로 돌아올지 알 수 없는 상태로 하염없이 객지 생활을 해야 했다. 귀양은 형벌이기도 하지만, 왕정이라는 정체(政體)를 방방곡곡 인민의 내면에 심어놓는 심리적·문화적 장치이기도 했다.

둘째, 대개의 경우 관직을 맡는 것 자체가 집을 떠나는 일이다. 교통편이 여의치 않았으므로 주말부부도 불가능하다. 가족과 떨어져 세를 얻어 살거나 객사에서 적적하게 지내야 했다. 셋째, 사신(使臣)이 돼 먼 나라로 가는 일이 있다. 여진 지역으로 갈 때도 있지만 행선지는 주로 중국과 일본이었다. 2박 3일 같은 짧은 일정은 상상도 못 할 일이었고, 말과 배를 타고 몇 달씩 다녀와야 했다. 나이 든 사신은 오가다가 죽기도 했다.

겸재 정선이 무르익은 필치로 금강산의 진면목을 드러낸 ‘해악전신첩(海嶽傳神帖)’. 금강산 그림 중에서 독보적인 가치를 인정 받고 있다. ‘삼부연’. [사진 간송미술문화재단]

겸재 정선이 무르익은 필치로 금강산의 진면목을 드러낸 ‘해악전신첩(海嶽傳神帖)’. 금강산 그림 중에서 독보적인 가치를 인정 받고 있다. ‘삼부연’. [사진 간송미술문화재단]

공통점은 어쨌든 집 떠나면 고생이다, 라는 결론일 텐데, 마지막 네 번째가 예외다. 바로 여행, 곧 유람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집이 그립기는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떠날 때의 설렘은 귀양살이나 사행(使行)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달랐다.

유람은 어려운 기회였다. 여가를 내기도 어려웠고 여비도 버거웠던 만큼 귀한 경험이었다. 누군가 여행을 떠났거나 여행에서 돌아왔을 때 부러워하는 편지를 쓴다든지, 나도 예전에 다녀왔다고 자랑삼아 얘기하는 모습은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그래서 ‘유람기’를 남기거나 그림으로 그려 와 공유하는 일이 생겼다. 서울로 과거 보러 서너 번 다녀오면 가세가 기운다고 할 정도였으니, 조금 과장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나들이 비용은 지방관 등의 협찬이 없이는 어려웠을 것이다.

겸재 정선이 무르익은 필치로 금강산의 진면목을 드러낸 ‘해악전신첩(海嶽傳神帖)’. 금강산 그림 중에서 독보적인 가치를 인정 받고 있다. ‘단발령’. [사진 간송미술문화재단]

겸재 정선이 무르익은 필치로 금강산의 진면목을 드러낸 ‘해악전신첩(海嶽傳神帖)’. 금강산 그림 중에서 독보적인 가치를 인정 받고 있다. ‘단발령’. [사진 간송미술문화재단]

거리도 문제였다. 북한강·남한강·섬진강·금강 같은 내륙 수로를 빼고 육로로만 가늠해보자. 서울에서 경기도 개성이 160리(65㎞) 정도, 평안도 의주까지 대략 1200리(500㎞), 충청도 천안까지 200리(80㎞) 남짓, 경상도 동래까지 960리 정도(390㎞), 전라도 나주까지 740리(300㎞) 정도였다. 하루에 50리(20㎞)를 간다 해도 서울에서 천안까지 너댓새는 가야 하고, 함경도 함흥까지 가려면 보통 스무날 이상을 잡아야 했다. 걸어서든 나귀를 타든 힘든 건 비슷했다. 어차피 속도가 중요하지 않은 나들이였으니 굳이 빨리 갈 이유는 없었지만, 관직을 맡거나, 병치레 중이거나, 농사라도 조금 짓는 사람이라면 유람이 엄두가 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소문난 승경(勝景)은 달랐다. 지리산·속리산·북한산·구월산…. 제주 한라산은 대상이 아니었다. 너무 멀었다. 돛단배로 한참 바다를 건너야 했다. 유람이 아무리 좋아도 목숨과 바꿀 만큼 좋을 수는 없었다. 백두산 역시 너무 멀고 추워 트레킹 코스가 되긴 어려웠다. 도리어 한라산과 백두산 가까이에 있는 제주 대정현과 개마고원의 삼수·갑산은 유배지였다.

겸재 정선이 무르익은 필치로 금강산의 진면목을 드러낸 ‘해악전신첩(海嶽傳神帖)’. 금강산 그림 중에서 독보적인 가치를 인정 받고 있다. ‘정자연’. [사진 간송미술문화재단]

겸재 정선이 무르익은 필치로 금강산의 진면목을 드러낸 ‘해악전신첩(海嶽傳神帖)’. 금강산 그림 중에서 독보적인 가치를 인정 받고 있다. ‘정자연’. [사진 간송미술문화재단]

드물고 귀한 유람의 첫째가는 승경, 조선사람들의 버킷리스트는 단연 금강산이었다. 전국 각지에서 금강산으로 떠났다. 서울에서는 동대문→양주→철원 또는 녹번→양주→포천→철원에 이르러, 고성→외금강→내금강으로 들어가거나, 또는 역순으로 내금강→외금강→고성으로 내려왔다. 서울에서 400리(160㎞), 구경하는 날까지 계산하면 한 달 정도 예상해야 했다. 화성(畫聖)으로 불리는 겸재(謙齋) 정선(鄭敾 ·1676~1759)의 화폭을 따라가 보자.

서울에서 출발하면 경기도 포천 한탄강에 있는 화적연(禾積淵)을 만난다. 포천은 서울과 원산을 잇는 추가령 구조곡에 있는데, 이곳은 험한 고개 없이 수월하게 다닐 수 있는 자연도로다. 조선 6대로 중 하나인 경흥대로이다. 예전에는 ‘볏가리’를 물어야 찾을 수 있었지만 지금은 포천시에서 단장을 해놓았다. 겸재의 그림 ‘화적연’도 일품이지만, 화적연 실경도 승경의 풍치를 과시한다.

화적연·삼부연·정자연 등 명승 탐방

포천을 지나 강원도 철원으로 넘어가면 솥 세 개가 놓인 듯한 삼부연(三釜淵) 폭포를 본다. “윗가마는 가운데 가마로 떨어지고, 파도는 아래 가마에 걸렸구나”라고 하였듯이, 삼부연 폭포는 삼단 폭포의 위용을 과시한다. 숙종이 장희빈을 왕비로 올리며 시작된 기사사화(1689)로 아버지 김수항(金壽恒)이 사약을 받자 김창흡(金昌翕)이 폭포 근처 용화리에 은거하기도 했다.

금강산 길은 병자호란 때 평안감사 홍명구(洪命耈)가 전투 끝에 순절한 금화읍 ‘잣나무밭’을 거쳐 건천리 수태사(水泰寺) 입구로 이어진다. 금화의 진산(鎭山 주산)인 오신산에 있다. 평강군으로 넘어가면 정자연(亭子淵)이 있다. 주지하듯이 철원·금화·평강은 6·25 때 ‘철의 삼각지대’로 불리며 수많은 젊은 목숨이 스러져 간 비극의 땅이다.

금화에서 내금강으로 넘어가려면 금성(金城)을 거쳐 단발령을 넘어야 한다. 드디어 단발령(斷髮嶺)에 이르렀다. 높이 834m. 강원도 창도군과 금강군 사이에 있는 고개로, 금강산으로 가는 간선도로에 해당한다. 겸재의 ‘단발령’에는 도포 입은 사람 여섯 명 정도, 시동으로 보이는 아이 몇이 있다. 아직도 나귀를 끌고 올라오는 사람도 보인다. 단발령에 있는 몇몇은 멀리서도 승려임을 알 수 있다. 그 옆에 남여(藍輿)가 놓여있다.

김창흡 “화가의 삼매에 신령이 녹아”

도포 입은 양반들이 승려가 메는 남여를 타고 올라왔을 것이다. 금화 현감이나 회양 군수가 근처 절에 징발을 명했을 것이고, 주지는 승려 몇을 부역에 동원했을 것이다. 정약용(丁若鏞)은 ‘가마 메기의 고통’에서 "가마 타기 좋은 줄만 알고, 메는 사람 고통은 알지 못한다… 헐떡이는 숨소리는 물여울 소리와 뒤섞이고, 헤어진 적삼은 땀이 흠뻑 젖는다… 새끼줄에 짓눌려 어깨엔 홈 파이고, 돌멩이에 멍든 발은 아직도 낫지 않네”라고 읊은 적이 있다.

몇 번을 올랐을까. 겸재는 금강산의 진경(眞景)을 여러 편 남겼다. 그중 간송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금강내산(金剛內山)’은 만년 득의의 작품이다. 스승 김창흡은 겸재의 그림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봉래산 다섯 번 밟고 나니 다리 피곤하여, 쇠약한 이 몸 금강산 신령과 이별하리라. 화가의 삼매에 신령 녹아들었으니, 무명 버선 푸른 신 다시 신어 무엇하리.” 누워보는 그림도 좋지만, 겸재 따라 금강산으로 답사가자고 했던 학생들과 맺은 약속은 언제나 지킬 수 있을까.

더는 덜어낼 게 없는 겸재 그림
금강산은 남북관계에 코로나19 팬데믹이 겹쳐 더욱 가보기가 어려운 곳이 됐다. 그게 아쉬워 간송미술관 소장 ‘해악전신첩(海嶽傳神帖)’의 그림 몇 편을 감상했다. 이 화첩은 겸재가 72세 되던 1747년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수업 시간에 『겸재를 따라가는 금강산 여행』(최완수) 등을 교재로 쓰면서 그림을 낯설어하는 학생들에게 두 가지만 염두에 두라고 말한다. 첫째, 겸재의 시그니처를 찾아볼 것. ‘금강내산’에 두드러진 예각 준법(峻法), ‘인왕제색도’에 보이는 암벽을 훑어내리는 과감한 부벽준(斧劈峻·도끼가 쪼개듯 내려찍는 필법), 흙과 바위의 절묘한 음양(陰陽) 포치 등등.

둘째, 구도나 구성이 좋은 작품인지 어떤지 모르겠으면, 일단 사람이든, 바위든, 나무든 손으로 그림 중 일부를 가리고 보라고 한다. 좋은 그림은 가려진 그 구성물이 없으면 허전하다. 더는 덜어낼 게 없는 것이다.


출처-[오항녕의 조선, 문명으로 읽다] 금강산 유람이 조선의 로망, 겸재 그림은 선물보따리 | 중앙일보 (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