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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산책] 나는 완전 바보, 그대는 반절 바보
작성일: 2022-08-26 조회수: 294 작성자: 한문교육과


  청장관 이덕무는 사천 이병연을 영조조 첫째 가는 시인이라 높이 평가하면서, “사천(槎川) 당시의 화가(畫家)로는 관아재(觀我齋) 조영석(趙榮祏), 겸재(謙齋) 정선(鄭敾)이 있었다. 함께 백악산(白岳山) 밑에 살았는데 문채와 풍류가 한때 찬란했었다.”라고 하였습니다. 오늘 소개할 작품에는 사천과 그의 벗이 보인 시작(詩作)에의 열정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두 사람의 노시인이 보인 예술혼이 감지되고 있어 ‘문채와 풍류가 찬란했다’던 이덕무의 고평이 그리 과장된 것이 아님을 알게 합니다. 시 제목에 언급된 ‘반치옹(半癡翁)’은 이병연의 벗 이태명(李台明)으로 반치(半癡)는 그의 호입니다. 이태명은 전주이씨(全州李氏)로 이병연의 부친인 이속(李涑)에게 수학하면서 이병연과 교유하게 되었는데 시도 잘하고 시조창도 잘 했던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시인은 첫 번째 구에서 이태명의 호인 ‘반치(半癡)’를 장난스럽게 활용하여 자기는 ‘완전 바보(全癡)’이고, 이태명은 ‘반절 바보(半癡)’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부분에 그 이유를 밝혔습니다. 두 번째 구를 보면, 시인은 오경이 다 돼서야 시를 완성하고, 기쁜 마음에 벗을 불러 함께 시를 수창하려 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반가운 벗은 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기다리다 기다리다 결국엔 잠이 들고 말았습니다. 3구의 ‘꿈에까지 거듭 찾았다(重尋夢)’는 표현은 기다리다 지쳐 잠이 들었고, 이태명의 꿈까지 꾸었다는 말로 깜박 잠이 들었다는 것을 재미나게 표현한 것입니다. 그런데 4구를 보면 이병연이 쿨쿨 자는 사이, 이태명이 찾아왔고, 이태명은 자고 있는 이병연을 앞에 두고 화답시를 읊었습니다. 이런 상황을 나중에야 알게 된 이병연은 겸연쩍고 미안한 마음에 ‘자기는 완전 바보’라 하면서 그 미안한 마음을 이렇게 시로 적어 전한다는 내용입니다.

 

   이 시를 읽다 보면, 기다리다 쿨쿨 잠이든 이병연의 모습과 그 앞에서 시를 읊는 이태명의 모습이 그려져 절로 웃음이 터져 나옵니다. 친구를 불러놓고 친구가 온 줄도 모르고 쿨쿨 잠이 든 이병연. 그리 우아하거나 단정한 모습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병연은 왜 자신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시로 그렸을까요? 시를 다시 한 번 음미해보도록 하지요.

 

   시인은 새벽녘에야 시를 완성하였습니다. 이는 창작의 삼매에 빠져 날을 훌쩍 샌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시인은 시 완성에 그치지 않고 절친한 벗, 이태명을 부릅니다. 이태명이야말로 자신의 작품을 제대로 알아 화답해줄 친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겠지요. 그런데 이태명은 바로 오질 않습니다. 왜 일까요? 새벽이라 아직 잠에서 깨지 않았기 때문일까요? 4구를 보면 답이 보입니다. 이태명이 즉시 오지 않은 것은 자신도 이병연의 시구에 화답할 만한 작품을 고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만족할 만한 시가 지어지자 이태명은 이병연을 찾습니다. 그런데 기껏 찾아갔더니 정작 이병연은 쿨쿨 잠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태명은 자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고, 시를 목청껏 읊조립니다.

 

   시에 그려진 두 사람의 모습은, 상식과 법도라는 측면에서 보면 모두 일탈된 모습입니다. 상식적인 사람이라면 누가 새벽에 시가 되었다며 친구를 부르겠습니까? 또 무례한 부름을 언짢아 할 만도 하건만 그 부름에 응하여 자고 있는 이병연을 앞에 두고 시를 읊은 이태명의 모습을 또 어떻습니까? 이 두 사람이 소위 상식과 예의를 벗어난 행위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첫째 두 사람 간의 깊은 우정이 있었기 때문이요, 둘째는 이 두 사람이 상식을 넘어서는 창작에의 열정을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오경에 시를 지어 벗을 부르고, 또 그 벗은 자고 있는 벗 앞에서 시를 읊조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듯 이 작품은 장난스러운 웃음을 빌어 두 노시인의 깊은 우정과 예술혼을 담아낸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두 시인이 보인 예술적 교감은 진솔하고 깊은 사귐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이병연은 시를 통해 일탈도 멋진 일로 포장할 수 있음을 말하고자 한 게 아닙니다. 말하고 싶었던 점은 바로 벗 사귐의 진실함이었습니다. 가식과 허위로 꾸며진 사귐이 아니라, 설령 일탈적인 모습일지라도, 자신의 생각을 진솔하게 나눌 수 있는 그런 사귐이 중요하다는 것을 이 짧은 시편을 통해 우리에게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글쓴이 한문교육과 김형술 교수


출처 한국고전번역원 고전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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