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논문

  • HK+연구단
  • 연구성과
  • 연구논문
연구성과 | 학술논문 게시글의 상세 화면
[HK+연구단] 근현대 ‘위성(衛聖)’ 공동체의 등장과 지역 사회 변동 -전주향교(全州鄕校)를 중심으로(1920~1960)-
작성일 2021-01-12 조회수 675 작성자 한국고전학연구소
첨부 : 20201210.논문.근현대 ‘위성(衛聖)’ 공동체의 등장과 지역 사회 변동 -전주향교(全州鄕校)를 중심으로(1920~1960)-.pdf 파일의 QR Code 20201210.논문.근현대 ‘위성(衛聖)’ 공동체의 등장과 지역 사회 변동 -전주향교(全州鄕校)를 중심으로(1920~1960)-.pdf  20201210.논문.근현대 ‘위성(衛聖)’ 공동체의 등장과 지역 사회 변동 -전주향교(全州鄕校)를 중심으로(1920~1960)-.pdf
UCI :
DOI :
LINK :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2675466




국문초록


전근대 향교는 향촌 교육과 지역민 교화의 구심점이었고, 근대에는 식민권력에 흡수되어 촌락지배 선전기관으로 작동하였으며, 현대에는 유교 문화 부흥을 위해 공자 사상을 전파하는 기관으로 이어져 왔다. 이처럼 향교는 전근대부터 현대에 이르는 거시적인 시대 변화와 함께 미시적인 지역 사회 변동이 담겨 있는 상징적인 공간이다.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 전주향교 내에 세워진 존성회(尊聖會)와 위성계(衛聖契)는 같은 목표를 표방하였지만 실질적인 활동 양상이 달랐다. 일제강점기 조직된 존성회는 ‘유학의 진흥’을 목적으로 설립되었으나 지역 유지 중심으로 구성된 공동체였기에 조선총독부의 식민정책에 흡수되기 쉬웠고, 결국 지배정책의 촌락 전파를 위해 활동하게 되었다. 해방 이후 설립된 위성계는 해방이라는 사회적 혼란 속에 일어난 유림 사회 내의 균열, 그리고 일반사회에 널리 전파된 유학 혐오 사상의 제어를 위해 설립된 지역공동체였다. 하지만 이는 한국 전쟁의 발발로 쉽게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결국 종전 이후 사회가 다소 안정화된 1954년에서야 위성계는 완성될 수 있었다. 동일 기관에서 동일한 목적을 표방하며 설립된 공동체임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성격은 상이하였다. 두 공동체 사이에는 일제강점기와 해방이라는 거대한 사회적 전환이 외부 요인으로 개재하였고, 내부적으로는 구성원의 변화가 큰 영향을 미쳤다. 때문에 존성회와 위성계는 각기 다른 형태의 성현 보호 운동을 수행하였다. 향교의 정체성은 향교를 점유하고 있는 지역공동체의 성격에 따라 결정된다. 때문에 향교 연구를 위해서는 ‘공간’으로서의 향교가 아니라, 지역공동체의 ‘집결지’로 위치했던 향교에 주목해야 한다. 근대 이후 향교가 유교 문화의 재현 공간으로만 존재한 것이 아니라 지역공동체의 의견에 따라 소비된 유교문화의 부산물이었기 때문이다. 탈유교사회에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향교는 향교만의 역사가 아니라, 향교를 공유하고 있던 인간과 공동체의 발견을 통해 보다 넓은 시각으로 재해석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