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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K+연구단] 석전의 상징성과 향교 석전의 식민지적 변용
작성일 2021-01-12 조회수 702 작성자 한국고전학연구소
첨부 : 20201203.논문.석전의 상징성과 향교 석전의 식민지적 변용.pdf 파일의 QR Code 20201203.논문.석전의 상징성과 향교 석전의 식민지적 변용.pdf  20201203.논문.석전의 상징성과 향교 석전의 식민지적 변용.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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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초록


본 연구는 유교제례인 문묘 석전이 조선총독부의 유림정책 속에서 어떻게 변용되었는지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이를 통해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조선왕조는 건국 초기부터 석전을 국가에서 주관했다. 우리나라 문묘에는 우리나라 18현이 중국의 유현들과 함께 석전의 대상이 되었다는 점과 문묘 종사에 주자학의 도통이 강조되었다는 점이 중국과 다르다. 그리고 성균관과 전국 향교에 문묘를 설치하여 국가 차원에서 석전으로 거행한 것은 조선 왕조의 이념적 성격을 드러내는 것으로, 조선왕조의 정체성을 내외에 선언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일제는 통감부 시기부터 유림들의 활동 공간인 향교를 통제했다. 강점 직후, 향교가 총독부와 일본인 관리들의 통제 속에 들어가게 되면서 향교의 기능과 역할에 큰 변화가 있었으며, 더불어 석전에도 큰 변화가 있었다. 첫째, 문묘 석전의 주관자인 제관 및 참여자의 변화를 들 수 있으며, 둘째, 석전 제문의 날짜 표기⋅독축(讀祝)방식⋅날짜 변경, 셋째, 양무 및 계성사 향사의 일시적인 폐지, 넷째, 석전의례 중 서고식(誓告式) 추가, 마지막으로 경학원과 향교의 문묘 개방과 일반인 출입의 허용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변화는 총독부가 ‘원활한’ 식민통치를 위해 유학을 중요하게 여기는 모습을 보여줌과 동시에 석전의례 속에서 오랫동안 지속해 온 조선의 유교적 전통을 의도적으로 배제하고 자신들의 통치 권력의 현재성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심지어 석전행사를 일반인에게 개방하고, 경학원 명륜당과 전국 향교를 혼례식장으로까지 개방한 조치는 문묘로 상징되는 조선의 전근대적 사회 질서를 파괴함으로써 신민지 통치를 ‘근대화’로 미화한 것이었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에 앞서 총독부는 전국 유림의 동향 파악에 더욱 적극적이었다. 석전을 강연회 등 각종 행사와 연계시킴으로서, 식민지 조선인에게 식민통치의 당위성을 선전하여 일제의 식민통치에 순종하도록 유도하고, 나아가 일제의 침략 전쟁과 식민통치에 철저하게 이용하였다. 이로서 석전은 기존의 제사로서의 기능이나 신성함을 완전히 상실하게 되었고, 일제가 일으킨 침략전쟁의 적극적인 선전의 장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