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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항녕의 조선, 문명으로 읽다] 농지와 산림은 만인의 자산, 민생 바탕 다졌다
작성일: 2021-03-23 조회수: 329 작성자: 김민정

임금의 땅, 백성의 땅

풍속화가 김득신(1754~1822)의 ‘천렵도’(川獵圖). 어른과 아이가 함께 물고기를 놓고 젓가락질을 하고 있다. 고된 일상을 잠시 잊고 여유를 즐기는 듯하다. 이렇듯 강이나 산은 누구나 이용하는 곳이었다. [사진 간송미술관]

풍속화가 김득신(1754~1822)의 ‘천렵도’(川獵圖). 어른과 아이가 함께 물고기를 놓고 젓가락질을 하고 있다. 고된 일상을 잠시 잊고 여유를 즐기는 듯하다. 이렇듯 강이나 산은 누구나 이용하는 곳이었다. [사진 간송미술관]

1793년, 정조(正祖)는 『일득록』에서 말했다. “송 선정(宋先正·송시열)이 현종 때 흉년을 만나 조정의 비용을 줄이자고 했다가 비방을 받고 조정에 있기 불안하여 고향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선정이 기러기가 날아가는 것을 보고 ‘내가 공물(貢物)까지 혁파하지 못한 것이 한이다’ 했다고 한다.”

 

“산천은 백성과 공유”가 사상 기조
갯벌·어장·뒷산·숲 등 백성에 개방
왕실·토호의 사유화 확대에 저항
이이·송시열 등 세제 개혁 주장

송시열

송시열

공물이란 백성이 왕=조정에 바치는 진상(進上)을 말한다. 진상은 수량도 수량이지만 품질의 엄격성을 요구했다. 정조는 송시열의 이런 자세를 나랏일을 위한 헌신이라고 했다. 헌데 현종·숙종이 받아들이지 않은 진상 혁파를 정조였다면 받아들였을까.

 

어릴 적 외가와 친가는 강과 개울의 중간쯤 되는 ‘내깔’을 사이에 두고 있었다. 내깔은 학정천(鶴井川)이라는 멋진 행정 명칭을 가지고 있었지만 알 바 아니었다. 여름에는 멱 감는 곳으로, 겨울에는 썰매 타는 곳으로, 천연의 놀이터가 됐다. 할머니는 사람이 빠져 죽어서 귀신 나온다며 어떻게든 나를 거기서 떼어놓으려고 했지만, 귀신에 대한 두려움보다 노는 재미가 더 컸다. 내깔은 붕어는 물론 가물치·메기·뱀장어·조개를 제공하는 단백질 창고이기도 했다. 붕어를 장독에 말린 뒤 짚불에 구워 먹으면 간식으로는 그만이었다.

 

내깔은 조선 사람들이 ‘산림천택’(山林川澤)으로 불렀던 곳의 하나였다. 누구나 가서 놀기도 하고 생계 보조 물자를 얻어오는 대지를 가리킨다. 갯벌·저수지·연안 어장이나 양식장·염전·목초지, 나무하는 동네 뒷동산이 그것이다.

 

공유지 통해 대체식량·땔감 마련  

 

조선 정부는 건국 초부터 ‘산림천택은 백성들과 공유한다’(山林川澤 與民共之)는 정책을 펴서 숲을 민간에 개방했고, 필요한 경우 봉산(封山)으로 설정해 출입을 제한했다. 백성들은 개방된 숲에서 땔감과 보조식량을 얻었고, 새로운 경작지를 마련할 수 있었다. 바다에서도 어살·소금가마·고기잡이배 등 과세 대상을 제외하고 갯벌과 근해의 조개·굴·김·연안 어류 등이 유력한 생계 수단이 됐다.

 

과전법이 시행된 14세기 말 이래 산림천택은 농경지와 땔감 채취지로 다수 전환됐다. 16세기에 본격 등장하는 입안(立案·권리 증명)과 절수(折受·권리 분급)로 개발된 산림천택에 대한 토지의 사적 소유권을 확립할 수 있게 되면서 숲 개발이 더욱 촉진됐다. 하천변 습지와 늪은 둑과 보의 설치를 통해 이용도가 증가했다. 15세기에는 조정과 수령이 농지개간을 주도했고, 16세기 이후 지방 사족과 백성이 주도했다. 이는 17세기 이후 화전 등 농지개간을 더욱 촉진함으로써 산림천택의 곳곳이 농경지로 전환됐고, 새로운 마을이 자리 잡으며 원시적 산림은 점차 축소됐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했다. 사적 소유와 사회적 공유 사이의 모순이었다. 지역의 토호, 조정의 세력가, 왕실의 공유지 점거 내지 사유화를 한 축으로 하고, 공유지 사용권을 가지고 있던 백성들의 관습을 한 축으로 한다. 조짐은 진즉 있었다.

 

BC 4세기경, 제 선왕이 맹자에게 문왕(文王)의 동산이 사방 70리였느냐고 물었다. 그렇게 크냐는 뜻이었다. 백성이 도리어 작다고 생각했다고 맹자는 대답했다. 문왕의 동산은 풀 베고 나무하는 사람들이나 꿩이나 토끼를 잡는 사람들이 갈 수 있었으니, 크기가 중요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제 선왕은 사방 40리의 땅(공유지)을 차지하고 백성들의 출입을 막고 처벌했다. 이 대화는 국가권력의 정점에 있는 국왕의 공유지 침탈과 공유지를 관습적으로 이용해오던 백성들의 저항을 극명히 보여준다. 맹자는 왕토(王土) 관념에 의해 땅의 주권이 왕에게 있다 하더라도, 그 땅을 이용할 수 있는 권리를 백성과 공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단백질과 땔감을 공급해주던 공유지를 둘러싸고, 땅에 뿌리박고 살아온 농민은 군주를 정점으로 한 국가권력과 기나긴 생존권 투쟁을 시작했다는 신호였다.

 

조선 왕실은 내수사란 관청을 통해 살림살이를 했다. 왕실도 사람 사는 곳이니 소비 생활이 필요하고, 관리자가 있어야 한다는 건 이해가 간다. 헌데 내수사를 따로 설치하지 않고 호조에서 관리해도 되지 않았나? 그렇게 못한 이유가 있었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왕족은 5대가 지나면 왕실에서 떨어져 나가게 돼 있었다. 즉 공가(公家)가 아니라 사가(私家)가 되는 것이다. 사가가 되면 알아서 벌어 먹고살아야 하는 것이다. 하긴 갈수록 늘어날 왕실 인원을 어떻게 마냥 놀고 먹이겠는가? 여기에 왕실 재산을 둘러싼 왕정의 자기모순이 있었다. 공가이자 잠재적 사가를 국가 재정에서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 하는 점이다. 사가를 호조에서 관리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 결과 내수사라는 어정쩡한 관청을 둘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원래 왕실에는 ‘사사로운 재산’이 없다. 모두 왕의 것이므로 왕은 ‘사사로이 가져서는 안 된다.’ 내수사가 관리한 것은 사유지가 아니라 재용(財用), 즉 소비일 뿐이었다. 그 소비를 위해서 왕의 이름으로 개간 농지나 산림천택의 일부를 떼어주었다. 『광해군일기』에서 사관은 내수사의 전횡이 이 무렵 시작된 것으로 말했지만, 실은 세조·성종 때부터 그러했고, 연산군·광해군 때 더 심해졌을 뿐이다.

 

왕실 살림 맡은 내수사 폐해 커져

 

율곡 이이부터 유성룡·이원익을 비롯해 김육·이경여·송시열 등이 줄기차게 내수사를 없애라고 주장했지만 없애지 못했다. 아니, 왕정 아래서는 없앨 수 없었다. 대신 내수사의 산림천택 점유 폐단에 대한 제도적 규제가 시행됐다. 1707년(숙종33) 궁방과 아문의 둔전·시장·어살·어장·소금가마, 기타 절수처로 민폐를 일으키고 있는 곳은 일제 조사하여 혁파했다. 바닷가 백성에게 부담이 됐던 어장과 염전의 중복 징세·과다 징세를 시정했다. 그렇지만 내수사와 궁방은 언제든지 ‘여민공지’의 공유지를 침범할 준비가 돼 있었다.

 

내수사 폐지, 왕실 농지에 대한 절수의 금지, 산림천택 이용권에 대한 여민공지 사상, 진상의 혁파 주장은 ‘공유지(공유재)’의 보존이라는 하나의 고리로 연결돼 있었다. 삵괭이가죽·표범가죽·곰가죽·노루·사슴·산수달피·사다새·송이버섯…. 『세종실록지리지』에 나오는 공물인데, 야생일수록 진상이 많았다. 이들은 산림천택이라는 공유지에서 나오는 생산물이다. 송시열이 진상 공물 혁파를 주장했던 이유는 산림천택에서 그만 수탈하고 백성의 몫으로 남겨두라는 뜻이었다.

 

일제강점기 토지조사사업으로 동양척식회사가 차지한 국유 농경지 면적이 13만7000 정보였다. 동척 소유가 된 미간지의 면적은 120만 정보였다. 농경지의 10배였다. 즉 ‘공유지로 볼 수 있는 토지’가 불과 10여 년 사이에 ‘총독부에 의해 처분 가능한 국유지’로 탈바꿈한 것이다. 총독부는 공유지를 개인이 개발하여 사유하도록 조장했다. 제어할 정치세력이 없는 총독부가 주도한 공유지의 사유화였다.

 

이런 일이 지금도 벌어지고 있다. 서산과 영종도의 갯벌과 공유수면을 매립하여 서산농장과 인천공항이 들어섰다. 거기에 자본이 투여됐다는 사실만으로 사유화(민영화)가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실제 법률적으로도 사유화는 아주 쉽다. 공항·철도·수도·의료 등 공유재가 국유 또는 국가 관리권 아래 있으면서 쉽게 사유화의 제물이 될 수 있다. 적어도 국가는 국민에게 불가결한 공유재를 지켜야 한다. 그럴 때만이 국유=사유가 아니라, 국유=공유가 될 것이다.

 

국유는 공유인가, 또 다른 사유인가
지난해 11월 52년 만에 일반에 개방된 북악산 북측 탐방로. [연합뉴스]

지난해 11월 52년 만에 일반에 개방된 북악산 북측 탐방로. [연합뉴스]

사유화가 가능한 국유는 공유일 수 없다. 공유는 처분할 수 없는 재화, 만인이 누려야 할 재화를 말하기 때문이다. 사유화가 가능한 국유가 노출된 사회에서는 재화를 처분·매각·독점할 수 있는 사유로 바꿔칠 틈을 누군가가 호시탐탐 노리게 마련이다.
 
인천국제공항 인근의 영종도 갯벌이다. [연합뉴스]

인천국제공항 인근의 영종도 갯벌이다. [연합뉴스]

현재 갯벌·해수욕장·하천·호수 같은 공유 수면은 국가나 지자체, 한국토지주택공사가 매립할 경우 면허 관청의 승인만 얻으면 매립이 가능하다. 매립 뒤 준공검사 확인증을 받으면 국가·지자체, 또는 매립면허취득자가 매립지의 소유권을 가진다. 처분 불가능한 공유지가 처분 가능한 국유지=사유지로 변하는 마법은 이렇게 쉽다. 이런 논리와 법리로 철도·수도·공항·전기 등의 사유가 합리화된다. 이걸 지키는 것이 맹자의 여민공지(與民共之) 사상이었다. 기본자산은 뭐 대단히 멀리 있는 게 아니다.

 

오항녕 전주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출처: 중앙일보] [오항녕의 조선, 문명으로 읽다] 농지와 산림은 만인의 자산, 민생 바탕 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