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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항녕의 조선, 문명으로 읽다] 4~5인 자영농이 대세, 아들딸에 균분·분할 상속했다
작성일: 2021-03-23 조회수: 329 작성자: 김민정

소가족·소농의 시대

풍속화가 단원 김홍도의 ‘경직도’(耕織圖) 가운데 타작 부분. 한 해 농사를 마무리하는 흥겨운 장면이다. [사진 공아트스페이스]

풍속화가 단원 김홍도의 ‘경직도’(耕織圖) 가운데 타작 부분. 한 해 농사를 마무리하는 흥겨운 장면이다. [사진 공아트스페이스]

계해년(1623) 3월 14일, 반정(反正)이 일어났다. 광해군대 내내 궁궐 공사에 매년 호조 세금의 15~25%를 낭비했던 영건도감을 비롯해 궁중의 푸닥거리를 맡았던 나례도감 등 12개의 난립했던 임시관청을 없앴다. 왕실에 현물로 바치던 세금도 급하지 않은 종류는 없앴고, 반정에 공을 세운 신하들에게 줄 곡식도 중지했다. 폐위된 군주인 광해군대의 역사를 담은 『광해군일기』는 간행되지 못하고 초고 형태로 남았다. 조선왕조 처음으로 실록 편찬이 미완으로 끝났다. 그만큼 광해군대의 실정이 낳은 국가 재정의 압박은 심했다.

 

농민의 생활 안정이 국가의 기초
세금 제도 정비도 민생안정 위주
19세기에도 장자 독점 상속 안보여
농업 생산력도 꾸준하게 늘어나

이는 15년 동안 배타적 인재 등용, 연이은 옥사로 인한 인재 손실, 매관매직 등 사회 기강의 붕괴가 이어진 데다 궁궐 공사라는 토목과 무계획적인 파병이 겹친 결과였다. 임진왜란 때보다 체감 고통은 심했다. 왜란의 상처가 남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왜란은 외부 침략의 결과였지만, 15년의 파탄은 광해군 정권의 지속적인 실정의 결과였기에 내상과 좌절은 깊을 수밖에 없었다. 반정, 말 그대로 사람들이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가는 조치가 절실했다.

 

반정의 핵심은 백성들이 다시 부모·자식을 봉양하고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하는 일이었다. 즉각 조도성책을 불태웠다. 조도성책은 궁궐 짓고 왕실에서 굿을 할 비용 조달을 위해 임시 관원인 조도관들이 작성한 특별 징세 대장이었다. 민간에 이미 쌀과 포 역시 탕감했다. 인조 즉위 후 삭감한 세금의 양이 11만석이었다(당시 호조 1년 전세 8만석). 재정의 궁핍을 돌아볼 여유조차 없었다. 백성들의 생존이 먼저였다.

  

사림, 자영농 사회를 이상사회로 생각

 

조선시대 궁궐에서 진행된 모내기를 재연한 모습. [뉴스1]

조선시대 궁궐에서 진행된 모내기를 재연한 모습. [뉴스1]

문제 하나 내겠다. “국가는 ○○ 때문에 망한다. ○○에 들어갈 말은?” 전쟁, 부패, 간신, 토목공사를 떠올렸는가? 다 맞다. 이는 모두 ‘세금’으로 수렴된다. 노동력과 물산을 포함하여 인민에게 거두는 넓은 의미의 세금. 재정과 군대를 지탱하는 세금 말이다. 인류 역사의 전개는 정착→농업→국가의 순이었다. 국가 이전에 정착을 하고 농사를 짓던 ‘국민 이전의 농민’들이 있었다. 이들에게 조세는 느닷없는 노상강도와 다를 바 없었고, 징집은 어처구니없는 억류였을 것이다. 아메리카 인디언들이 미국 정부에 비슷한 경험을 했고, 식민지시대 징집되던 학도병도 같은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물론 군사정권에 강제징집 당하던 내 친구들도 같은 느낌을 가졌을 것이다. 이 ‘수탈과 억류’의 느낌은 국가가 국민의 삶에 정통성을 가지지 못할 때 선명해진다.

 

광해군 시대의 국정을 기록한 『광해군일기』 중초본표지. [중앙포토]

광해군 시대의 국정을 기록한 『광해군일기』 중초본표지. [중앙포토]

국가와 농민의 관계에서, 민생은 세금과 부역의 균형에 달려 있다. 거두는 데 절도가 있어야 안정된 농사가 가능하다. 농사가 가능해야 사회의 재생산, 종족의 재생산이 가능하다. “일반 백성은 일정한 생업이 없으면 그 결과 안정된 마음을 가질 수 없다. 마음이 불안하면 방탕하거나 사악해져서 못하는 행동이 없어진다. 그러다 죄를 짓게 되면 형벌을 주니, 이야말로 백성들을 그물질하는 짓이다.”(『맹자』) 일정한 생업에서 나오는 안정의 느낌은 “위로 부모를 모시고 아래로 처자식을 먹여 살리는 데 부족하지 않은” 데서 나온다. 이것이 사회, 종족, 그리고 경제의 재생산이다.

 

광해군 시대의 국정을 기록한 『광해군일기』 중초본 내용. 재정이 파탄나 실록을 간행하지 못했다. [중앙포토]

광해군 시대의 국정을 기록한 『광해군일기』 중초본 내용. 재정이 파탄나 실록을 간행하지 못했다. [중앙포토]

흔히 생각하듯 조선의 가족은 대가족이 아니었다. 당시 호적의 호당 식구수는 4~5명, 남성 직역자는 호당 1명이었다. 물론 이는 관청에서 파악한 호의 규모이지만, 자연호 즉 일반 가족을 반영한다. 호적을 보면 혼인과 함께 부모나 형제와 분리되는 현상을 관찰할 수 있다. 실제로 동거하면서도 호적에 나뉜 경우도 있지만, 기본 단위는 소규모 가족이 보통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16세기까지 자녀 사이에 재산이 균분 상속되다가 17세기 이후 장자 위주로 상속된다고 보았다. 심한 경우 ‘장자 독점 상속’이라는 말도 썼는데, 그럴 수는 없다. 둘째, 셋째 자녀도 먹고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상속은 제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데, 이는 첫째 비용 때문이고, 둘째 제사가 종족보존과 상속의 의례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처가와 거리가 멀어지고 자녀 간에 돌아가며 지내던 제사가 줄어들면서, 점차 아들 중심으로 균분 상속을 하고 제사를 위한 재산을 별도로 상속하는 경향을 띠었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18~19세기까지도 균분 또는 분할 상속을 보이며 장자 독점 같은 상속 형태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어머니 재산의 독자성도 여전한 것으로 미루어 딸 자녀에 대한 상속도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소규모 가족과 균분 상속의 유지는 조선시대에 농지의 소유나 임대를 통한 자영농=소농 사회의 반영이기도 했다. 고려말 공민왕 때 세금과 군대를 감당할 국민을 창출하려던 개혁이 좌절한 뒤 그 창출은 왕조 교체라는 혁명을 통해 가능했다. 농민에 대한 불균등 과세 요인을 제거하고, 관리들에게 녹봉으로 줄 과전법을 정비한 것이다.

 

조선 세종 때 농사 기술을 정리한 『농사직설』. [중앙포토]

조선 세종 때 농사 기술을 정리한 『농사직설』. [중앙포토]

세종대 『농사직설』을 비롯한 농업서적은 경작방식, 비료 등의 기술을 보급해 생산력을 높였다. 유럽에서 씨앗 하나에 5배의 수확을 올렸지만, 동아시아에서는 20~100배, 조선에서는 30배의 수확을 거둔 것으로 추정된다. 그만큼 생산력이 높았다.

 

새로운 지식인층이었던 사림(士林)은 마을공동체 내의 가족경영 모델인 정전제에 주목했고, 이를 근거로 자영농 사회를 이상으로 생각했다. 그 이상이 늘 성공하지는 못했고, 또 이상이기에 도달할 수 없었지만, 이들의 관직 진출을 계기로 국가 농업정책의 기본 방향이 자영농 육성과 안정으로 설정되었으리라는 것은 예측할 수 있다. 관직의 유동성이 커서 수시로 낙향했던 상황에서 농업은 양반에게도 생업이긴 마찬가지였다. ‘농업을 중시하고 상업은 누른다’는 숭본억말이나, 토지 겸병의 가능성이 높은 토호 세력의 억제는 이런 정책의 다른 표현이었다.

  

가족 경영과 마을공동체가 조화 이뤄

 

생산력이 안정되자 국가의 수세 구조도 바뀌었다. 들쭉날쭉하기 쉬워 방납의 폐단을 낳았던 공납제는 대동법을 통해 전세에 통합하였다. 공납과 함께 족징·인징의 폐단을 낳던 군역 또한 일부를 전세로 한 균역법으로 이어졌다. 이는 토지가 안정된 생산력을 담보했다는 의미이며, 그 토지는 농민 경영으로 경작됐다. 또한 소농=자영농은 마을 공동체의 보호와 협력, 그리고 산림천택이라는 공유지의 존재로 인하여 뒷받침됐다. 가족자본에 기초한 소농은 가족주의에 갇혀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동안 1960년대 이후 조선 후기사 연구의 주요 흐름은 지주제와 신분제의 변동을 추적하는 데 있었다. 지주제하에서 새로운 농업 경영 주체로서 부농이 성장하고 이는 다시 생산관계의 변화를 초래했다는 관점은 신분제 변동(실제로는 신분제의 폐지)과 연결됐다. 이제 학계에서는 이 목적론적 역사 해석에 회의적인 듯하다. 지주나 광작이 없지 않았지만 자영농=농민경영=가족농=소농이 우세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때 사회경제사가들이 프랑스 분할지 농민 등을 두고 주장했듯 자영농은 자본주의적 생산으로 가는 걸림돌이 아니었다. ‘수고한 뒤에 수확의 보람이 있는 생산활동’인 자영농은 원래 비(非)자본주의적이었고 그렇기에 지금은 자본주의 농업을 넘어설 대안 중 하나일 것이다. 인간은 먹고 살 식량 생산이 필수라는 점에서 자영농의 정치경제적 조건을 만들어가는 것이 앞으로 과제다.

 

자영농이 기업농보다 우월한 이유
자영농의 ‘가족 자본’은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데 일차적 목적이 있지 않다. 즉 노동력과 생산수단을 재투자하여 잉여가치를 더 많이 만들어내는 데 사용되지 않는다. 자본주의 아래의 일반 기업이나 자본주의적 농업과는 달리 평균 이윤율과 동일한 수준의 수익률을 낳아야 할 내적 필요성이 없다.
 
심지어 수익률이 마이너스라 하더라도 농민의 농지는 경영될 수 있고 세습 재산을 확장할 수 있다. 세습 재산은 이윤을 창출해야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농가는 그저 살림살이를 유지하면 되는 것이다.
 
농업의 역사는 집약화의 역사다. 단위 토지에서 생산성을 높이는 노력의 역사다. 그런데 자본제 농업의 집약화는 ‘농민 농업=소농=자영농’의 집약화에 비해 훨씬 열등하다. 농민 농업은 한계지 개간, 종자나 퇴비 같은 단위면적당 투여자본, 이윤이 아닌 노동소득의 추구에서 자본제 농업보다 생산력 증대에 우월한 조건에 있다.

 

오항녕 전주대 역사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출처: 중앙일보] [오항녕의 조선, 문명으로 읽다] 4~5인 자영농이 대세, 아들딸에 균분·분할 상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