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로키움] HK+연구단 제26차 콜로키움(2020. 7.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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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20-07-03 조회수: 729 작성자: 한국고전학연구소 |
일시 : 2020년 7월 1일(수) 4시 장소 : 전주대학교 한지산업관 201호 강사 : 류시현(광주교육대학교) 주제 : 최남선(1890~1957)과 조선학 연구 전주대 한국고전학연구소 HK+연구단은 류시현 교수(광주교대)를 모시고 “최남선(1890~1957)과 조선학 연구”라는 주제로 26차 콜로키움을 진행하였다. 육당 최남선은 1890년생으로 번역과 일본유학을 통해 근대 사조를 수용했다. 10대 중반의 나이에 일본으로 유학 가면서 본격적으로 근대를 접하게 되었는데, 차별과 더불어 자신감에 차 있는 일본의 모습과 대비되는 초라한 조선의 모습에서 민족을 발견하였다. 이후 귀국하여 1908년 신문관을 설립하고 잡지 『소년』을 발간하였다. 1910년의 강제병합 이후인 1911년에는 조선광문회를 세웠다. 출판사 설립과 잡지 발간은 “민족공동체를 구성하는데 중요한 수단이었으며, 합법적으로 제국주의 논리와 대결할 수 있는 영역”이었으며, 조선광문회는 지식인의 네트워크를 구성하고 전통과 조선문화를 연구하여, 정신적인 영역에서 대결하고자 하는 의식을 보였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활동에 힘입어 1919년 29세의 나이로 ‘기미독립선언서’를 작성했고, 3·1운동에 참여했다 투옥되는 등의 경험을 통해 민족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조선학’을 제창하고 단군 연구 등을 수행하였다. 1920년대 최남선의 조선학 연구는 일본인과의 대결의식에서 비롯되었으며, 단군연구를 통해 ‘단군이 곧 조선’이라 주장했다. 민족성에 대해서는 중국과 대등하며 일본에 문화적 영향을 끼쳤다고 보았으며, 한국사를 민족적, 자주적, 문화적 관점에서 재정리하였다. 또한 금강산과 백두산 여행을 통해 1927년에는 ‘불함문화론’을 제창하기도 했다. 이러한 1920년대 최남선의 변화는 계몽주의자에서 역사학자이자 민속학자로 변모했다고 정리할 수 있다. 그러나 1928년에 조선사편수회에 참여하면서부터 일본에 협력하기 시작하여, 전시체제기에는 일본의 침략전쟁을 지지했고, 1938년에는 만주 건국대학의 교수가 되기도 했다. 심지어 1943년 메이지대에서 학도병으로 참전하기를 권유하는 강연을 하기도 했다. 이 시기 최남선은 민족 중심의 사고에서 일탈하여 ‘동양’을 강조하였다. 이후 최남선이 주창한 조선학의 개념과 그의 친일행적, 그리고 그가 추구한 근대 등을 두고 질의와 토론이 이어졌다. |